
‘걸어도 걸어도’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대표작으로,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현실감 있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도쿄 외곽의 조용한 마을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하루를 통해 세대 간의 감정, 후회, 침묵 속의 사랑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2025년 5월 재개봉을 통해 다시 관객들과 만난 이 작품은, 잔잔한 감동과 깊은 여운으로 일본 가족영화의 정수를 보여주며 새롭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 걸어도 걸어도: 가족이라는 감정의 퍼즐


‘걸어도 걸어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2009년에 발표한 영화로, 어느 여름날 부모 집에 모인 가족의 하루를 조용하게 따라갑니다. 오랜만에 부모를 찾아간 아들 부부와 손자, 그리고 딸의 방문을 통해 가족 구성원 각각의 관계, 감정의 틈, 오해와 애증이 드러납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묶여 있지만, 서로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불편한 침묵과 잊힌 기억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과정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고레에다는 이 영화에서 가족을 이상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존재하는 갈등과 미묘한 감정선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특히 아들을 잃은 부모의 감정과 남겨진 자식의 부담감,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내면은 고요하지 않은 가족의 풍경은 많은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감정을 억제하고 표현을 삼가는 일본 특유의 문화 속에서 ‘사랑한다’는 말 없이 서로를 마주하는 방식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번 2025년 5월 재개봉은 ‘가정의 달’이라는 시기성과 맞물려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영화의 섬세한 감정선이 현대 가족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세대와 관계없이 누구나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특별한 기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부모를 이해하는 시선으로, 중장년층에게는 지나간 가족의 시간에 대한 회한으로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 도쿄의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정서

영화의 배경은 일본 도쿄의 외곽, 전형적인 주택가입니다. 화려한 스카이라인이나 도시의 소음 대신, 조용한 골목길, 낡은 가정집, 창밖으로 들리는 매미 소리와 식탁 위의 계절 음식들이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일상의 디테일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영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도시의 외형보다는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정을 비추는 데 집중합니다. 정원에서 함께 걷는 장면, 오래된 집의 목재 문, 욕실 타일의 질감, 점심상에서의 대화 등은 도쿄라는 도시가 가진 ‘기억의 장소’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공간적 연출은 영화의 핵심 메시지인 ‘지나간 시간을 되새김질하는 방식’을 더욱 감정적으로 각인시킵니다.
2025년 재개봉에 맞춰 다시 스크린에 걸린 이 배경은, 팬데믹 이후 빠르게 변화한 도시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바쁘고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잊고 지낸 ‘느린 삶’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점에서 ‘걸어도 걸어도’는 도쿄를 배경으로 했지만, 모든 도시인에게 닿는 보편적인 감성을 품은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삶과 죽음을 대하는 고레에다의 시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세계는 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조용히 관통합니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무거운 감정은 15년 전 죽은 아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부모는 그 아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다른 자식에게 기대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가족 간의 틈을 만들게 됩니다. 감독은 이처럼 죽음을 통해 남겨진 사람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죽음은 단지 상실의 순간이 아니라, 남겨진 이들에게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고레에다는 이를 과장되지 않은 일상의 흐름 속에 녹여내며, 관객이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슬픔이나 후회를 넘어선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2025년 재개봉 시점에서 이 영화가 더욱 큰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팬데믹과 여러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족의 의미, 죽음의 순간을 직접 마주한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흐름은 단지 영화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절제된 연출과 잔잔한 음악, 미세한 표정 변화는 이 작품을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기에 충분합니다.
‘걸어도 걸어도’는 단순한 가족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놓쳐버린 감정, 하지 못했던 말,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재개봉을 통해 더 많은 관객에게 다가간 이 작품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조용하지만 강하게 다가오는 이 영화는 일본 가족영화의 정수이자,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진정한 명작입니다.